관계: 그 빛과 그림자 10-1/3

관계: 그 빛과 그림자 10-1/3

지미현 2 447 2
10. 1/3

다음날 아침, 샤워를 마친 혜란은 젖은 긴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며, 입을 옷을 고르고 있었다. 어젯밤 언제 들어왔는 지 모르는 타냐는 아직도 잠에 취해 있었고, 방안에 술냄새가 진동을 했다. 몸에 두른 수건을 벗겨내고 최근에 친구들에게 선물 받은 연한 갈색 란제리를 입은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가슴도 적당한데다 날씬하고, 군더더기 없는 몸매가 만족스러웠다. 일자리 면접이나 학교 행사 등 공식적인 자리에서 입을려고 아껴둔 진한 곤색의 짧은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무릎 바로 위까지의 길이에 가슴이 V로 파인 민소매 원피스는 약간의 스판 재질로 혜란의 몸에 딱 달라 붙어 그녀의 몸에 잘맞았다. 스타킹을 신으려다가 그냥 굽이 없는 단화를 신었다. 다시한번 온몸을 거울게 비춰본 혜란은 골아떨어진 타냐를 힐끔 보고는 침대 위에 놓인 작은 핸드백을 가볍게 들고 방을 나섰다.
     
혜란이 건물 안에서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유리 문을 통해 그가 이미 건물 밖에 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구겨지지 않은 깔끔한 청바지에 흰 셔츠와 옅은 갈색의 얇은 여름용 자켓을 입고 차에 기대 서서 혜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혜란을 보자 반갑게 그녀를 맞이한 그는 그녀를 태우고 차를 출발시켰다. 조수석에 앉은 혜란은 짧은 치마를 의식해 핸드백을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려 놓았다.

두사람은 점심 때까지 고급 빌라와 아파트 몇 군데를 둘러 보았다. 그 중 혜란은 학교에서 조금 거리가 있지만 뒷마당도 있는 타운하우스 형식의 복층 구조의 빌라가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서 사는 자신을 머릿속에 그려 본 혜란은 하루 하루가 행복할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에게서 독립을 하려 했던 마음은 이미 그를 본 순간 사라졌다. 그 동안 그에게 가졌던 원망은 그를 다시 만남과 동시에 혜란의 마음 속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혜란과 남자는 시원한 스트로베리 레몬에이드와 파스타로 점심식사로 하며, 오늘 본 집들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식당 웨이터 역시 집을 보여주던 부동산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혜란과 남자의 관계에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것이 돈이 많아 보이는 세련된 중년의 남자와 어린 동양 여자가 부녀사이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연인 사이로 보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아 보이기 때문이었다. 혜란과 남자는 수개월의 공백도 무색하게 큰소리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남자는 간간히 몸을 혜란에게 기대며 그녀에게 귓속말을 했고,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그의 어깨를 때리거나 눈을 흘기고 웃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그들은 혜란이 마음에 들어하는 빌라를 계약하기 위해 다시 부동산 사무실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혜란은 엄마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녀는 엄마와 통화를 한 지도 거의 두어달이 되어 가는 것 같았고, 남자의 입에서도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앞만 보고 살기로 다짐했다. 더 이상 과거에 휩싸이고 싶지 않았고, 옛날 살던 집을 생각하면 언제나 혼자였던 외로움이 밀려왔다.

“무슨 생각해?” 남자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혜란에게 물었다.

“아..아니에요” 혜란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기 계약하고, 가구 좀 보러가자”

“어떤..?”

“혜란이 쓸 가구하고, 내가 쓸 것도 등등 필요한게 많을 거잖아”

“그거 전부 다 사게요?”

“필요한 건 사야지. 안그래?”

“돈 많이 들텐데…”

“그래도 사야지. 안 그럼 바닥에서 잘거야? 하하”

“…” 

혜란은 큰 집을 다 채우는데 드는 비용이 장난이 아닐 거 같은 생각에 ‘괜히 큰 집으로 하자고 했나’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런 혜란의 마음을 읽었는 지 남자가 말을 이었다. 

“걱정마라. 어차피 혜란이 아니어도 회사 때문에 집은 구해야 되는 거고, 어차피 너 기숙사 비도 내가 내는데 이제 그거 안들어가니까 집을 좀 크게 가도 되지않겠어?”

남자의 말에 혜란의 기분이 좀 나아졌다. 사실 자신의 기숙사비가 더이상 들어가지 않으니 그의 말은 맞는 셈이었다.

부동산 사무실에 도착한 두사람은 에이전트의 도움을 받아 서류를 작성했고, 남자는 수표로 보증금과 첫달 렌트비를 지불하고, 사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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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란은 필기체로 자신감 있게 사인하는 그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혜란은 꿈만 같았다. 그 동안 앞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어떻게 벌어 학교생활을 할 지 걱정이 앞섰는데 갑작스런 그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약간은 걱정이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무실을 나온 두사람은 이사 들어갈 빌라에 들여 놓을 가구를 보러 가구상들이 모여 있는 거리로 출발했다. 가구상으로 가는 동안 혜란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뭐라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뭘?”

“옛날에 어릴땐 오스카 아저씨라고 했는데… 이제 미스터 베론이라고 해야할까요?”

혜란이 어렸을때 니콜라스 발음이 어려워 오스카 아찌라고 부르던 것이 그녀에게 그는 오스카 아저씨로 불렸었다.

“음… 넌 뭐가 좋겠어? 자기 어때? 히히히”

“네?!” 혜란은 그의 농담에 얼굴이 붉어졌다.

“부르고 싶은데로 불러. 아무렴 어떠냐?”

하긴 그랬다. 니콜라스 아저씨도, 오스카 아저씨도, 미스터 베론도 상관없었다. 혜란은 그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했다. 어렸을적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그를 다시 만나 그녀는 든든한 울타리가 생긴 것 같아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좋았다.

침대, 소파, 테이블 등 필요한 가구만 구입하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외 잡다한 물품들은 혜란이 주중에 틈틈히 구입하기로 하였다. 빌라의 마스터 베드룸은 혜란이 사용하기로 하였다. 혜란은 극구 사양하며 나머지 세개의 방중에 하나를 사용하겠다고 했지만, 오스카는 빌라에 매일 거주하는 혜란이 큰 방을 써야한다고 혜란이 쓰게했다. 혜란을 위해 그는 킹사이즈 베드와 화장대등을 갖춘 5피스 침대 세트를 구입했고, 혜란은 열아홉의 나이에 걸맞지 않는 다며 사양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가구점에서는 혜란의 가구들을 포함하여 오스카의 침대와 거실의 소파 등 모든 가구들은 다음 주 혜란이 빌라 열쇠를 받는 날에 맞춰 빌라로 배달해주기로 하였다.

혜란과 오스카는 오스카가 머무는 호텔로 저녁식사를 위해 돌아왔다. 하루 종일 걷고, 사람들을 만나느라 두사람은 녹초가 되었다. 식사도 식사지만 혜란은 그냥 씻고 자고 싶었다.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오스카가 떠나기 때문에 마지막 저녁을 그렇게 헤어질 순 없다고 생각했다. 저녁을 같이 하며 그와 상의 할 내용을 정리 하기로 했다.               
오스카는 내일 돌아가면 약 3주 후에 다시 오기 때문에 그 동안 혜란에게 집 정리등을 혼자 하게 하는 것이 미안했다. 같이 있으면서 가구를 들여 놓고 정리하는 것을 도와 주고 싶었지만 돌아가면 쌓여 있는 일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미안하다. 다음 달 초에 가급적 하루라도 빨리 올게. 내 마음은 여기 있어. 알지?”

“걱정마시고, 일 보세요. 여긴 제가 다 알아서 할께요.”

“정말 혜란이 많이 컷구나..하하하”

“이제 두달만 있으면 스무살이라구요” 혜란이 자신있게 말했다.

웨이터가 얼음에 꽂힌 화이트 와인을 가져 와 능숙하게 코르크를 따고 혜란에게 테스팅을 권유 했다. 혜란과 오스카가 새우와 석화를 곁들여 와인을 두어잔 마시는 동안 그들이 주문한 해물요리가 하나 둘 나왔고, 두사람은 허기진 배를 채우며 두번째 병을 비웠다.

“혜란, 졸업하면 아저씨 회사에서 일할래?”

“전공이 안맞잖아요.”

“무슨 상관이야. 내가 채용하면 그만이지”

“그런게 어딧어요? 근데 월급은 많이 줄거에요? 키키”

“월급? 달라는 데로 줄게..크크크”

“진짜? 두말 하기 없기에요..”

두 사람은 농담을 진담처럼 진담을 농담처럼하며 가는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 간간히 두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어졌고, 혜란은 천천히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그를 바라 봤다. 그럴때면 그는 눈웃음과 함께 키스하는 입모양으로 혜란을 쑥스럽게 만들었다.

오스카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지는 듯하더니 혜란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했다.

“혜란아,… 늦었는데 자고 갈래?”

혜란은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혜란은 언제부턴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그의 여자가 되기를 바랬고, 그렇게 만 될 수 있다면 무슨 댓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다짐했었다. 혜란은 지금 그 문턱에 와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으로 결정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네”

혜란은 그를 보며 대답했지만, 대답과 동시에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창피했다.

오스카는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일어나 혜란에게 손을 내밀었고, 혜란은 그를 보며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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